"장 대리, 나하고 같이 갈 데가 있어요."
야근 시간인 이 밤에 어딜 간다는 거지? 밤에 사장이 가자고 하면 무섭잖아. 그리고 정규 업무 시간이 끝났는데 어딜 간다는 거야?
"네? 어딜..."
쫄아서 얼버무리게 되지. 그리곤, 사무실을 나와서 왼쪽 복도로 걸어가. 그때서야 '아, 올게 왔구나.' 하는 불안감이 발톱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왔어. 거긴, ○엔지니어링 밖에 없거든.
처음으로 이 회사를 접한 건 삼○전기 밀링머신 건 때문에 알게 되었잖아. 내가 분석해 보니 못할 것 같아서 포기한 거. 그때는 내가 사무실을 찾을 일도 없었는데 두 달 전, 새 프로젝트를 '병'의 입장에서 맡으면서 처음 사무실을 찾아가 보면서 알게 됐어. 직원 수가 20명은 넘어 보이는 B커뮤니케이션에 비하면 큰 회사였지.
연 사장은 아무런 설명 없이 내 앞에서 걸어갔고 나는 그를 따라 ○엔지니어링 회사 사무실로 들어선 뒤 조금 더 안으로 걸어가 사장실로 들어갔어. 거기서 이전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엔지니어링의 사장을 보게 되었어. 기름진 커다란 얼굴로 인상을 구기며 앉아서는 나와 연 사장을 노려보더군. 그리고 원래 그런지 모르겠지만 붉은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어. 연 사장이 고개를 숙여 그쪽 사장에게 인사를 하더니 손등으로 내 팔을 툭 쳤어.
"뭐해요, 장 대리. 사과를 안 드리고."
"네?"
갑자기 자다가 핸드폰 알람 울려서 놀라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밑도 끝도 없이 사과라니? 내가? 왜? 와이?
"장 대리가 잘못했으니 빨리 사과를 드리세요."
연 사장의 얼굴을 옆으로 노려보자 그의 얼굴에도 난처함이 묻어 있는 듯했어. 물론, 당황해서 표정을 다 스캔할 여유는 없었지. 순간적으로 연 사장에게 달려들었어.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합니까?!"
"... 일정 안에 안 끝난다면서요. 그럼 ○엔지니어링 사장님께 일정 연기된 거에 대해서 사과를 드려야죠."
"아니, 그건 제가 전에..."
근데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처음 듣는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며 깔렸어.
"이 새끼가..."
'이 새끼?' 놀랄 수밖에... 앉아있는 ○엔지니어링 사장을 내려다봤지. 미간이 더 일그러진 그 인간이 자신의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사기 담배 재떨이에 손을 가져가 잡는 거야! 순간, 얼마 전 '담배 재떨이 던지는 회사 대표' 뉴스와 거기에 맞아서 이마를 바늘로 꿰맨 직원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어. 곧바로 입을 닫고 고개를 푹 숙였지. 살아야 할 거 아냐. 근데... 보통 다른 회사 직원한테 이 새끼, 저 새끼라고 하나? 자기 회사 직원도 아닌데?
"빨리 사과드리세요."
연 사장은 내 얼굴을 살짝 훔쳐보려고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게 느껴졌어. 어쩌란 말야. 미치도록 억울한데 사과를 하라는 거지. 끓어오르는 울분에 촉촉하게 눈가가 젖어가, 입을 앙다물고 참아내고 있었어.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지. 아... 또 두 달 전으로 회귀하는 거야? 그런 장르인가 봐...
두 달 전, ××중공업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생산업체가 있었어. 여기서 선박 건조와 발전소 건설 같은 초대형 규모의 일을 해내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는데, 이 번 프로젝트가 탱크선이라고 천연가스를 실어 나르는 대형 선박과 관련된 거였어. 이 선박의 갑판 위를 지나가는 수많은 가스파이프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효율적인지를 설계하는 캐드 연동 프로그램이었어. 완전히 새로 개발하는 건 아니었고, 기존에 있던 소스를 분석해서 수정하고 제대로 된 결과를 내도록 하는 거였지.
이걸 ○엔지니어링이 수주했는데 또 하필이면! 개발 인력이 부족하다는 거야. 그걸 또 하청으로 받아서 나한테 넘어오게 된 거지. 그러고 나서 보니 재하청 말고는 일을 제대로 못 따오는 것 같은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뭐지? 연 사장은 꽤 사업수완이 좋은 거 아니었나,라는 의구심이 들고 있었어.
근데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여태껏 캐드 파일을 연계해서 작업하는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야. 물론 온라인 조문시스템을 위한 CCTV 연동 같은 것도 처음 해봤지만, 그때는 '이렇게 하면 되겠지'라는 감이라도 있었다면, 선박 설계시스템은 감이 하나도 안 잡히는 거야. 하지만 프로그램을 새로 만드는 건 아니니 기존 소스를 분석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판단했지.
그래서, 연 사장에게 상황을 정확히 전달했어.
"사장님, 제가 이 일을 맡으면 여기에만 전념해야 할 거 같아요. 지금 이틀 정도 분석을 해 봤는데, 이걸 끝내려면 두 달 넘게 걸릴 거 같습니다."
"음... 이거 두 달짜리 프로젝튼데..."
아... 또 시간에 쫓기는구나.
"네, 그래서 부탁드리는 건데요. ○엔지니어링 프로젝트 진행하는 동안 다른 일은 시키지 말아 주세요. 최대한 야근을 하더라도 두 달안엔 어떻게든 끝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장 대리가 두 달 동안 이 것만 전념할 수 있도록 딴 일을 안 시키겠습니다."
역시 말이 통하는 대표군. 이래서 믿음이 간다니깐... 뭐, 고장 난 와이퍼로 운전을 시킨 건 까먹은 거니 그럴 수 있지.
이거 뭐야!
"사장님, 이러시면 ○엔지니어링 꺼, 펑크 납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연 사장이 나에게 다른 웹사이트 개발을 가지고 온 거지. 아, 입으로 한 약속은 뭐 중요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이 웹사이트 개발도 진행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부장도 웹사이트를 세 개나 맡고 있으니 장 대리가 해줘야 해요."
"그럼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는 어떻게 합니까? 거짓말이 아니라, 이거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여기에 집중해서 두 달 반 정도 걸릴 거랬는데, 두 달 만에 끝내겠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죠? 지금 웹사이트 개발을 같이 진행하면 두 달안에 끝나지도 않을 겁니다."
프로젝트 마감을 못 지키는 게 위궤양이 생길 만큼 스트레스받는 거라는 걸 모르는 건지, 내가 그렇게 두 번이나 강조했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금 일손이 부족한 걸 어떡합니까. ○엔지니어링 건은 제가 책임질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웹사이트 개발하고 같이 진행해 주세요."
연 사장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지.
"하아...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책임진다고 하셨으니... 일단 진행할게요."
"걱정 말아요. 문제 안 생기게 할 테니까..."
근데 이 인간, 내 말은 아예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같아. 3주 정도가 지나고 ○엔지니어링에 가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한 금요일, 연 사장이 크진 않지만 조그만 웹사이트 수정 업무를 또 들고 던지는 거야. 시한폭탄처럼... 그때 확신했지. 무조건 터진다. 난 몰라...
연 사장의 책임을 진다는 게, 담당자인 나를 ○엔지니어링 사장 앞에 데리고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게 만드는 거였다니!!
회사 경력 3년도 채우지 못한 풋내기 직원이지만, 이 정도쯤은 얼핏이라도 들어서 알고 있어. 회사 간의 계약이란 대표와 대표 간의 계약인 거야. 내 이름은 계약서 어디에도 안 들어가. 그 말인즉슨,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면 대표가 책임지는 거지. 그렇지 않아? 안 그럴 거면 내가 내 이름 걸고 혼자서 일을 하지, 다른 사람 밑에서 왜 일하겠어?
내 눈에 눈물이 맺힌 걸 본 걸까 ○엔지니어링 사장도 재떨이에서 손을 떼고는 의자에 기대어 앉더군. 연 사장은 나를 계속 툭툭치고 있었어. 이 미친... 하지만 어쩌겠어? 억지로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시작했어.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시간에 마쳐야 하는데... 제 불찰로 늦어졌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붉은 얼굴은 좀 누그러들었어. 한숨을 내쉬더니 물어오더군.
"알겠소. 그럼 언제까지 시간을 주면 될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2주가 가장 많이 시간을 뺄 수 있는 걸 꺼야. 아마 한 달이라고 했으면 다시 재떨이가 날아왔겠지.
"보름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보름 안에 무조건 끝내겠습니다."
그러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치 자기 회사 직원들에게 하는 것처럼 말없이 손을 들어 휙휙 내젓더군. 나가라는 거지. 내가 먼저 ○엔지니어링의 사무실을 나갔어. 쿵쿵 걸으며 우리 사무실 쪽으로 몹시 빨리 발걸음을 옮겼고 연 사장은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오더군.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잖아. B커뮤니케이션으로 들어와 내 자리에 앉았어.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연 사장은 조용히 사장실로 들어가더군. 뒤에서 소리가 들리잖아 문 닫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 문을 노크도 없이 확 열어젖혔어. 그리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닫아버렸지. 연 사장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군.
"장 대리..."
사장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있었어.
"이게! 책임을! 지는 겁니까?!!!"
아마 내 목소리가 복도 끝, ○엔지니어링 사장에게까지 들렸을 게 확실해. 난 목소리가 엄청나게 큰 편이거든. 그와 동시에, 보통 자신의 테이블의 물건들을 가지고 하지만, 난 연 사장의 테이블에 있던 집기와 서류들을 잡아서 쓸어버리며 패대기쳐 버렸어. 연 사장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뒷걸음질 치더군. 이거 사장과 직원의 역할이 바뀌어 버린 거야.
눈은 핏줄이 터질 듯 혈압이 오른 게 느껴져. 거기에 내 얼굴도 시뻘겋게 열이 오른 게 느껴졌지. 아마 연 사장은 곧 있을 독일 월드컵 응원단, 붉은 악마를 눈앞에서 봤을 거야.
"뭡니까! 제가 두 달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펑크 날 거라고 말했잖아요! 알아서 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이게 뭐냐고요!! 제가 왜 저기 가서 사과를 해야 하는 겁니까!!!"
계속해서 나는 분노를 뿜었고, 연 사장은 손을 다소곳이 모은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었어.
"사장님이 책임지는 방식이 이런 겁니까? 그럼 앞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직원들이 다 나가서 사과하러 갈 겁니까!!! 사장이 직원을 보호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연 사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짧은 한 마디.
"미안합니다."
그 말이 그의 한계였어. 내가 그렇게 폭발한 이유는 모든 직원이 다 퇴근하고 나만 남아있던 그 저녁 시간을 택한 거야. 얼마나 비겁해? 그 뒤로 나는 머라고 한지도 제대로 생각 안 나게 한 5분 넘게 탈곡기에 털리는 볏잎처럼 연 사장을 털어버렸어. 아마 연 사장의 입장에서도 직원에게 손을 모으고 연신 사과를 해야 했던 기억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걸.
어디, 승질이 지랄 같은 사람한테 걸려가지고 말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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