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일은 모두 미뤄두고 ××중공업 선박 설계시스템에 매진했어. 물론, 내 입에는 쌍욕이 매 분 새어 나오고 있었지. 누가 듣든 무슨 상관이야. 아무도 못 건드려. 연 사장도 말을 못 붙이는 데, 뭐.
아, 한 번은 말을 걸더라. 내가 반항하는 차원으로 하얀 나시에 칠부 군복무늬 바지에 슬리퍼, 야구모자를 쓰면서 맨 살을 반 이상 드러내곤 출근을 했거든, 이틀 동안. 그랬더니 이틀째 되자 슬며시 와서 한 마디를 걸더군.
"장 대리... 복장이 너무 프리한대요..."
어쩔...
얘기를 안 하고 싶었지만, ××중공업은 창원에 있는데 아버지가 20년 넘게 전기 기술자로 공장 전력 담당에 있으면서 일하시다 몇 년전에 정년 퇴직한 회사거든. 내가 잘 알지 않겠어? 사실 그런 것 때문에라도 잘하고 싶었는데, 연 사장이 기분을 다 망친거지. 그래서 보름이 되기 전에 만들기로 한 기능을 다 만들어서 창원까지 가 담당자에게 사용방법을 설명해 주고 끝나고 나왔지. 어릴 때 아버지 회사 행사를 하면 뛰어놀던 운동장도 보였지만 얼마나 빨리 탈출하고 싶던지...
B커뮤니케이션은 점점 암울해져 갔어. 1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된 일이 들어오질 않는 거야. 맨날 하는 거라곤 예전에 작업했던 웹사이트 수정이나 이런 걸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무렵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어.
급여가 나오지 않는 거야. 첫 달 급여가 밀리면, 두 번째 달에는 이전 달의 급여를 주는 일이 반복되기 시작했지. 이게 아마 다닌지 8개월 정도 되었을 때일 거야. 그러자, 연 사장이 희한한 경영을 시작하네. '기관이나 기업의 수주를 따오는 영업적인 전략'도 포함해서 회사 경영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술집을 차리는 거야! 이게 말이 돼? A네트는 사장 집안이 주유소를 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술집은 뭐지?
그럼, 술집이 프로젝트를 따오는데 기여를 했느냐. 하나도 한 건도 못 따오고, 대접한다고 외상 술값으로 빚만 늘어나니 더 골치아픈 상황을 맞게 되었어.
이때, 인터넷 직장인 커뮤니티에 급여 미지급에 대해서 찾아보니 전국에 엄청나게 많은 사례들이 있더라구. 거기에 비슷한 고민을 올린 글을 봤는데, 그 아래 한 줄의 댓글이 눈에 박히더라.
'두 달 밀리면 가망없어요. 탈출하세요, 무조건!'
그리고 열달 만에 두 달 급여가 밀리는 일이 벌어졌어. 대신 A네트에서 처럼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 먼저 이 부장에게 월급이 밀려서 더 이상 못 다니겠다고 얘길 했지. 이 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큰 무리 없이 수긍하고 넘어가더군. 이 부장도 당연히 밀렸을 거잖아.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 직속 상사도 아닌 영업 박 부장이 갑자기 나서는 거야. 중년의 여자였거든. 나를 따로 상담실로 데려가서는 목소리를 높여서 혼을 내는 거지.
"장 대리는 회사에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요?"
의아했지. 책임감이라... 저기요, 우리 사장님도 책임감이 없거든요? 그 얘기를 하려니 일이 너무 많은 거지.
"자기가 맡은 일도 다 안 마친 상태에서 퇴사 얘기가 나옵니까? 퇴사를 언급하려면 맡은 일은 다 마치고 나서 해야지,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이야길 해오니 논리적이더라구. 내가 맡고 있는 일은 한 달 정도는 더 해야 마무리가 될 거 같았거든. 물론 지금 당장 급여가 안 나오는 문제가 시급했지만, 일은 일이잖아. 일이 되어야 회사에 돈이 들어오고, 돈이 들어와야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그래, 난 아직도 너무 나 자신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었어. 박 부장에게 사과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지. 아직도 난 더 배울 게 많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1주가 지나고 다음 주가 되었을 때야. 그 사이 박 부장이 보이지 않았거든. 영업을 나갔겠거니 했지. 2주 초, 그래도 평소보다 더 안 보여서 이 부장에게 그녀에 대해서 물어봤어.
"박 부장님 안 보이시네요?"
"박 부장님? 지난 주에 퇴사했는데?"
"네?!"
아... 뒤통수 맞은 거였어. 자기가 먼저 퇴사를 해야 하니 나를 붙잡아둬야 좀 더 쉽게 나갈 수 있는 꼼수를 부린 거였어. 완전 쓰레기인거지... 하하하. 쓰레기 영업 부장한테 제대로 당한 거야. 어떻게 했냐고? 바로 사장실로 달려갔어. 그리곤, 2주 뒤에 퇴사하겠다고 통보해 버렸지. 그리고, 남은 월급도 빨리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어.
결국,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11개월 만에 B커뮤니케이션을 탈출하고 말았지. 인생에서의 두 번째 회사였고, 1년을 채우지 못한 첫 번째 회사가 되었어. 아직 다음으로 다닐 회사를 구하지 못하고 회사를 나오게 되었는 데,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래서, 뭐 계속 붙잡는 연 사장을 무시하고 도망 나왔어. 그러다 보니 이직이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두 달 정도의 짧은 휴식 이후 다음 회사를 찾게 되었지. 좋은 점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좀 편하게 시청했다는 거야. 그렇게 세 번째 개발 회사 C안으로 옮겨가게 됐어.
C안을 다니고 있던 몇 달 후, 지하철 안에서 연 사장을 다시 만나게 돼. 퇴사를 하고는 한 해가 지난 후 였는데, 마지막 칸에 타고 있던 난 다음 역에서 멈추고 열린 출입문으로 동해인과 같이 올라타는 정장 차림의 연 사장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지. 나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는 눈치였어. 그렇다고 지하철을 안 탈 순 없지 않겠어? "안녕하세요."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연 사장도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지.
"잘 지내고 있죠, 장 대리?"
'네, 잘 지내죠. 사장님을 안 뵈니 더 잘 지내고 있죠.'
하지만, 짧게 '네' 라고 답하고 끝을 냈지. 하지만, 궁금은 하잖아?
"B커뮤니케이션은 잘 되고 있습니까?"
"아, 모르시겠구나. 폐업했습니다."
아, 그렇게 경영을 하는데 폐업을 안 할 리가 없지.
"그럼, 사장님은 지금 뭐하세요?"
"아, 저 지금 연산동에 있는 회사에서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충 들어보니, 직접 회사를 꾸리는 대표가 아닌 이름만 대표인 일명 바지사장이었어. 뭐, 그 뒤론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서 있었고, 연 사장은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이 흘러갔어. 그리고 얼마나 흘렀는지 곧 정차 역 방송이 나오자 연 사장이 나를 보며 말을 걸었어.
"전 이번 역에서 내립니다."
광고 찍나? 저 이번에 내려요~ CF속 여자 모델은 이뻤기나 하지.
"아, 네. 그럼... 잘 지내십시오."
하고, 인사를 건넸어. 살짝 웃음과 함께 무덤덤한 말투로 인사를 나누고, 잠시 후 문이 열리기 전 지하철이 멈췄어. 그러자, 연 사장이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얘기해.
"저... 장 대리, 진짜 미안했어요."
그리곤, 도망치듯 잰걸음으로 지하철 문 밖으로 나가더군. 미안할 만 하지. 왠지 알어?
갑을병... 신에게는 아직 받지 못한 한 달 치 급여, 200만 원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장님아.
B커뮤니케이션에선 이런 걸 알게 됐지.
사장은 날 책임져 주지 않아. 자기는 돈 만 벌면 되는 거야. 아닌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대부분 사장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이 우선인 거야.
그리고, 월급? 두 달 밀리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퇴사해. 그 이후로도 계속 그 현상이 계속된다... 그럼 그 회사는 가망 없어. 다시 회복하는 곳도 있겠지만 거의 없다는 거. 대기업처럼 기업 대출을 많이 해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거고 기사회생은 꿈도 못 꾸는 거야. 탈출이 정답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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