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월드컵의 여운이 사라질 9월, B커뮤니케이션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나서야 새로운 직장인 C안에 입사하게 됐어. 우연히도 첫 회사였던 A네트 근처의 빌딩 5층에 있던 IT개발 회사였지. 건물은 낡고 대지 넓이가 그리 넓지는 않았어도 C안은 5층 건물을 통째로 사용할 만큼 규모는 있었어.
공간을 3분의 1로 나눠, 작은 공간은 조 사장, 관리자 배 부장, 경리 곽 대리 세 명이 사용하는 공간과 사장실로 다시 나눠져 사용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나머지 3분의 2 정도 되는 오른쪽 큰 공간에 디자이너 3명의 파티션 영역과 여덟 명의 개발자 파티션 영역으로 나눠지고, 그 외 탕비실과 회의실 등으로 공간을 나눠 쓰고 있었지. 다시 A네트 같은 15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된 회사로 돌아온 거야. 같은 파티션이라고 해도 B커뮤니케이션 보다 사무실이 넓다 보니 각 한 사람 직원을 위한 영역이 꽤나 넓었지. 그게 가장 좋다고 해야 할 거야.
C안은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점으로 하는 개발은 제3 금융권, 다시 말해 저축은행 같은 곳의 웹사이트나 사내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였어. 그전까지는 전혀 관심도 없고 들어볼 이유도 없던 ○크레디트, ○○저축은행과 같은 이름의 금융기업 들이었어. 아마도 조 사장이 이전에 금융권에서 뭔가를 했었거나, 그쪽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모양이겠지. 하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어. B커뮤니케이션의 연 사장처럼 젊어서 키는 작아도 가볍고 날렵한 몸매를 가진 게 아닌, A네트의 문 사장처럼 배가 임산부를 넘어서는 거대한 비어밸리를 가진 전형적인 많이 먹게 생긴 아저씨 스타일이었어. 몸매 외에는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약간 흐릿한 인상이었어.
C안의 계약된 연봉은 B커뮤니케이션 보다 100만 원 많은 2,500만 원이었지. 그대로 과장이라는 직급으로 올랐지만 중소기업의 특징이 직급이란 게 '나는 과장'이라는 자기 위안일 뿐 실질적인 의미는 없는 거야. 회사마다 직급 별 연봉이라는 건 천지차이니깐. 두 번째 좋은 점은 동갑내기 친구가 생겼다는 거야. 최 과장이라고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가 나보다 조금 빨리 C안에 입사했고 금방 친해졌어. 한 살 많은 구 차장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같은 대학 선배야. 수학과를 나왔는데 복수 전공으로 컴퓨터 공학을 복수로 전공하고는 학사 졸업 후 바로 실무 경력을 쌓은 사람이었어. 이 선배도 학교에 있을 땐 얼굴을 볼 기회가 없다가 C안에서 친해진 선배였지. 구 차장은 거기에 회사 정직원이 아니었어. 회사에 이름은 올라와 있지만 일주일에 정해진 화요일, 목요일 정도만 나타나는 계약직 직원이란 걸 조금 지나고 나서야 할게 됐지.
여기에서의 첫 개발을 ○○저축은행의 금융관리 시스템을 만드는 일로 시작했어. 이름만 들으면 금융관리, 뭐 대단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론 대출신청자를 관리하는 웹사이트를 만드는 거에 불과해. 대출자가 얼마나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그 정보를 관리하는 페이지를 개발하는 거였지. 말이 시스템이지 그저 한 사람이 대출을 신청하면 신청한 사람의 신용점수를 깎고, 대출 가능 결과와 금액을 다시 알려주는 거야. 한 마디로 요새 뜨는 토○ 앱에서 대출 신청하는 거하고 같은 거였어.
이게 말은 쉽지만 웹사이트 화면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동작하는 기능인데 이 한 기능을 개발하는 데 5개월이 걸린 거야. 5개월이라고 하면 길지만 제시간에 해낸 거야. 그리고 이걸 동작시키는 함수하나를 만드는데 웹사이트의 기능 하나를 동작시키는 함수가 100줄도 안된다면 이건 1,500줄이 넘는 거였어. 겨우 하나 개발하는데 5개월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통의 15배였을 뿐만 아니라 난이도까지 생각하면 뭐 그렇단 거야.
"최 과장, 얼굴이 피곤해 보이는데?"
"아... 장 과장. 넌 요새 안 피곤해?"
"나? 괜찮은데? 운동 좀 하지?"
내가 살던 원룸 근처 단골 술집에서 막걸리 술잔을 기울이며 있었지.
"무슨 운동? 숨 쉬기도 힘들다, 야."
"운동도 힘들지. 그래도 건강하려면 해야 할 거 아냐?"
"나 무슨 운동해야 할까?"
최 과장에게 내가 하고 있던 운동을 나열해 주었어. 그때까지 나는 웨이트 트레이닝, 마라톤 그리고 두석 달 전부터 시작한 실내암벽까지 있었거든.
A네트에 다닐 때 대학교 앞 헬스클럽을 다니며 하던 운동을 접고 나니 반년만에 28인치 허리가 32인치가 되는 충격적 현실에 부딪히고 말았지. 너무 충격적이라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운동을 다시 시작했는데, 얼마나 힘들던지... 매일은 아니더라도 격일이나 삼일에 한 번씩이라도 운동을 하겠다는 습관을 들이고, 주말마다 10킬로 마라톤을 하고 4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허리가 다시 옛날로 돌아갔거든.
회사생활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내가 얻은 건 여유였어. 물론 여유가 있어서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눈치가 생긴 거지. 일을 빨리빨리 한다고 내가 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프로젝트 초반에는 쉴 수 있을 때 쉬는 요령이 생기니 여유가 찾아지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운동도 자연스럽게 거의 매일 하게 되었지.
C안에서는 썸 타는 여직원도 있었지. 사장실 앞에 앉아있는 곽 대리를 볼 때마다 좀 기분이 짠하더라구. 관리 부장 배 부장은 늘 조 사장과 외근이고 혼자 앉아있는 데, 나야 뭐 최 과장도 있고 가끔 보이는 구 차장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디자이너 직원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하니 괜찮지만 곽 대리는 뭐 없잖아? 또래도 없고 말이지. 그래서, 관심도 가고 하니 조 사장과 배 부장이 없을 때면 자주 말을 걸러 가곤 했어.
"곽 대리, 시간 돼요?"
초여름 오후였어. 보통은 내가 곽 대리 책상 앞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 데 그날따라 눈치를 좀 보며 두리번거렸거든. 당연히 조 사장과 배 부장은 자리에 없었어. 이유는 전날 회식 때문인데, 웃기게도 C안은 술 마시는 회식을 회사 사무실에 하는 습관이 있었어. 뭔 놈의 회사 회식을 왜 회사에서 하는지 몰랐지. 어김없이 사무실에서 술과 안주를 시켜 먹었고, 술을 많이 마신 조 사장은 사라졌고 배 부장은 외근을 핑계로 어디 짱 박혀 숙취를 해소하고 있었겠지.
"장 과장님, 무슨 일이에요?"
키도 큰 편에 눈매가 예뻤던 곽 대리는 당연히 회사에서 인기가 있었지. 큰 눈을 동그랗게 깜빡이며 물어오더군.
"한 삼십 분은 시간 되겠죠?"
"음... 전화야, 디자인 팀 이 과장님이 받아주실 거구, 오늘 그렇게 전화도 없어요. 왜요?"
"그럼, 나와요."
"어디 가는데요?"
궁금함이 한 껏 묻어있는 표정이었어.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장난을 안 치지만 좋아하고 관심 있는 사람이면 남녀를 따지지 않고 장난을 많이 치다 보니, 곽 대리도 나의 장난을 많이 받는 사람 중 한 명이야. 그래도 재밌다는 표정으로 따라오더군.
바로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 그랬더니 또 '어디 가요?' 하고 물어와. 그래서 입 앞에 검지손을 대고 '조용히'라는 의미로 대꾸했어. 그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갔어. 그리고, 거기서 다시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랐지. 그랬더니 곽 대리가 조용히 소리쳤어.
"어디 가는데?"
세 살 어린 곽 대리가 반말로 말을 한 건 아마 처음이었지, 그때가? 뒤돌아보니 여전히 화가 나거나 한 얼굴이 아닌 신기한 걸 보는 웃음기 가득한 개구쟁이 꼬맹이 표정이었어. 계속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고 먼저 나갔어.
"와~!"
"곽 대리, 여기 처음이죠?"
"네! 사무실 위에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푸른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건물의 앞인 동남쪽으로는 컨테이너가 즐비하게 적재되어 있는 야적장이 보이는 부산항이 위치해 있었고, 그 반대로는 많은 건물들 뒤로 낮은 산이 놓여 있어.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엔 정말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있는 좋은 장소였지. 심지어, 거기에 건물주일지 아니면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평상에 작은 파라솔까지 놓인 휴식 공간이 있었어. 그리고 그 평상 위에 내가 미리 준비해 둔 오징어와 마른안주, 맥주 두 캔이 놓여있었지. 사실 맥주는 근처 편의점에서 산거지만, 오징어와 마른안주는 어제 회사 회식에서 남은 거였어.
"저랑 마실려구 준비해 논 거예요?"
하곤 웃으며 곁눈질로 날 보더군. 어찌나 귀엽던지... 금세 고개를 돌려 끄덕이곤 다른 말로 넘어갔어. 부끄럽잖아.
"곽 대리는 나보다 먼저 입사해 놓고도 회사 건물에 이런 게 있는 지도 모르다니... 반성해야겠네."
"누가 회사 사무실 말고 옥상까지 올라와요?"
"나...""훗, 장 과장님 진짜 농땡이 꾼이에요. 일이라도 잘하니까 다행이죠.""나도 어제 우리 회식했으니까 생각한 거지, 평소엔 안 이래..."둘이서 시원한 맥주 캔으로 건배를 하고 맑은 오후에 썸 타는 여직원과의 휴식은 기가 막히게 달콤한 일이었어.
그런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두 번째 업무의 난이도 역시 극악무도했지. 이번엔 ○크레디트에서 사용할 사내 메신저를 만들래. 지금 같은 X톡이 없던 2007년 그때는 여러 IT기업들이 메신저 시장에 우후죽순처럼 띄어 들어 있던 시기였어. 개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더 많으니 회사 업무에 집중을 못한다고 회사 대표들이 울분을 토하기도 했고, 돈 많은 대기업은 결국 회사 업무용으로만 사용할 메신저를 직접 만들어 쓰는 거야. ○크레디트도 금융회사니 돈은 많고 회사 직원들이 개인 톡을 많이 주고받는 게 눈꼴셨나 보지.
"메신저 개발해 본 적 있나?"
내가 속한 팀의 팀장인 최 차장이 물어왔어. 하하하, 장난하십니까?
"아뇨, 없죠."
최 팀장 본인도 경험이 없다는 걸 솔직히 얘기하고는 나에게 도전해 볼지 여부를 물어보더군. 그 당시 이제 프로그래밍이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던 차라 해보고 싶더군. 그리고 이걸 해 놓으면 나중에 다른 회사로 옮겨갈 때 경력으로도 좋을 거라 생각했어.
"근데 해보고 싶네요.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그랬더니 최 팀장은 기분이 좋겠지. 부하 직원이 거부하지 않고 한다고 하니까...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물어와.
"그래? 알겠어. 잘 생각했어. 시간은 두 달 정도면 괜찮겠어? 그러니까 팔 주 정도되겠지."
두 달이면 될 거야. 뭐, B커뮤니케이션처럼 다른 일을 중간에 끼어 넣어서 화나게 하진 않았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시간을 좀 더 벌고 싶었어. 정확하게 10주.
"두 달 반 정도는 주시요."
"두 달 반? 음... 그래, 사장님께 잘 말씀드려 볼게."
결과는 두 달 반의 시간 확보. 직원이 못한다고 하는 것보단 낫잖아? 예전 같았으면 그냥 하겠다고 하는 데 가능하다면 쫓기지 않고 혹시나 모를 완충의 틈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해선 일부러 시간을 단 1주라도 더 늘려서 하기 시작했어. 이것도 여유를 찾기 위한 융통성이라고 할까?
확실히 그때 당시의 실력으론 혼자서 구현해 낼 수 없었어. 아무리 설계를 하려고 해도 설계도를 못 그리겠더라구.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지. 아마 일주일은 뒤졌을 거야. 포기할까 할 때쯤 눈에 들어온 게 메신저 소스를 판매하는 사이트를 찾은 거야. 가격이 무려, 100만 원. 근데 메신저 소스와 개발 설명서까지 모두 준대. 하지만, 월급이 200만 원인데 메신저 소스가 100만 원? 그럼 회사에선 사줄까? 그거 안 사줄려고 나보고 개발하란 건데. 말이 안 되지. 또 뒤지니까 외국 사이트에 메신저 소스 판매를 찾았는데, 이번엔 30만 원! 30만 원은 좋다 이거지. 근데 설명이 전부 영어네? 이거 영어 번역하다가 두 달 다 가겠더라구. 역시 패스.
검색하는 데 2주를 낭비하고 있던 그 마지막에 국내에서 꽤 유명했던 MS사와 관련된 IT 개발 정보를 제공하는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서비스하는 소스 판매 서브메뉴에서 5만 원짜리 간단한 기능을 담은 메신저 소스를 판매하는 걸 찾아냈어. 5만 원? 뭐, 회사 조직도나 나머지 것들만 내가 짜면 되겠더군. 100만 원, 30만 원에 비하면 엄청 저렴하고 내가 사는 데도 부담이 없잖아? 바로 구매했지, 회사에는 모르게...
그때부터 소스코드 분석에 들어갔어. 와, 처음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예전 A네트에서처럼 기획도 설계도, 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할려고 하니 막막하던데, 소스코드를 하나씩 읽어가며 분석을 하니까 머릿속에 설계도가 대충이라도 그려지기 시작하더군. 진짜 달랐어.
결과는 어떤지 알아? 2달도 되기 전에 ○크레디트 회사 조직도가 나와서 직원들끼리 마우스로 클릭하면 메신저 창이 뜨고, 필요한 데이터를 전송하고, 간단한 이모티콘도 쓸 수 있는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네○○온 메신저 축소판의 사내 메신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지. 그렇다고 그 시기에 바로 보고했을까? 아니, 남는 시간에 곽 대리와 저녁에 따로 만나 데이트도 하면서 계속 썸도 탔어. 그렇게 하니까 프로그램 개발이 더 재밌어지더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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