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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의 회사, 10번의 퇴사

최강 쓰레기 좋소 - 월급 빚쟁이! C안, 중

by 유고 담요 2025. 2. 13.

"월급 주세요."
조 사장 앞에 앉아서 쉴 틈도 없이 사장실의 방문 목적을 입 밖으로 꺼냈어. 이미 B커뮤니케이션에서 겪었던 일이지. 아마 다른 직원들은 처음 겪는 일이었지 않을까? 두 달이 밀린 것도 아니었어. 첫 달 급여가 밀리고 일주일도 안 돼서 찾아간 거야. 전체 미팅 때 급여 지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 C안에 다닌 지 9개월이 될 때였어.
"장 과장, 지금 말이지... 회사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말..."
"월급 주십시오."
단호하게 조 사장의 말을 끊고 내 말을 반복했어. 미안해하는 척 하는 표정이 내겐 연기로밖에 안 보이더군.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줄이 늘어냈지.
"아니, 일용직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도 일당이라도 받잖습니까? 저희는 한 달 벌어서 한 달 겨우 살아가는 달용직인데, 월급을 안 주시면 월세며, 통신비, 신용카드비는 어떻게 냅니까? 원룸 쫓겨나야 하나요?"
이번엔 진짜 조 사장이 더 난처한 얼굴이 되더군. 두 번째 벌어지는 상황이라 스트레스나 화도 나지 않았어. 그냥 이런 일을 또 겪어야 하는 회사에 온 나 자신이 한심해서 스스로에게 미안할 뿐이었지. B커뮤니케이션이 연 사장에게는 이렇게 쳐들어가서 돈 달라고 한 적도 없었지만 이젠 거리낄 것도 없잖아? 사장이든 회장이든 대통령이든 간에 월급을 안 주면 바로 찾아갈 태세에 항상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아아, 그렇지, 장 과장? 나도 참 난감하긴 하네... 미안하기도 하고..."
미안한 기색은 하나도 안 보였어. 말은 뭘 못 해? 조 사장의 다음 말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어. 만약에 못 준다고 하면? 나가는 거지. 퇴사하고는 노동부에 신고, 땡! 근데, 다음 말이 참 아이러니 하더라구.
"그럼, 이틀 내에 장 과장 월급 통장에 입금을 할 테니까... 다른 직원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게."
응? 이게 머야? 내가 월급을 받았는데, 다른 직원들에게는 말하지 말란 거잖아? 이순신 장군의 앞에는 생략하고,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씀은 알겠지만, 왜, 우리 편에게 말하지 말라는 건지 궁금해지더군. 상황이 안되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밀어붙이지는 못하는 거였어. 내가 업무 처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 인력이 부족한 건 조그만 중소기업에선 항상 일어나는 일이니까... 다른 직원에게 말하지 말라...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지. 하하하.
 
곧바로 동갑내기 최 과장에게 가서 이 상황을 모두 털어놓았어. 내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지. 최 과장도 한 달 급여가 밀린 상태였어. 조 사장 직접 찾아가서 밀린 급여를 받으라고 말이야. 내 언급을 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말한 것만 모르면 되잖아? 아, 대신 내가 너무 강하게 나갔으니 넌 우는 소리하라고, 그리고 오늘 가지 말고 내일 가라고 말이야.
그리고 끝이냐면 당연 아니지. 바로 다음으로 키도 덩치도 크지만 의외로 디자인 팀을 맞고 있던 서너 살 연상에  임 팀장 자리로 조용히 다가갔어. 나랑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었고 꽤 말이 잘 통하곤 했지. 살짝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았어. 책상 위엔 부인, 아들과 찍은 가족사진 안의 임 팀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지금 자기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얼굴은 사뭇 다른 약간 무겁고 무서운 굳은 인상이었지. 임 팀장에게 속삭이듯 말했어.
"임 팀장님도 월급이 밀렸어요, 혹시?"
내 물음에 임 팀장은 더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노려봤어. 아마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봤었으면 내가 혼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잠시 침묵이 지나더니 내 어깨를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군.
"나가자, 장 과장."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가 바로 근처 편의점 앞으로 가 작은 의자에 앉았지. 임 팀장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신 연기를 하늘로 뿜어낸 뒤 입을 열었어.
"나 지금 삼천만 원 가까이 밀렸어."
"뭐라구요?!"
삼천만 원이라니! 내 정신이 나갈만한 충격이었어. 너무나도 심하게 많이 못 받은 거잖아? 임 팀장의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한 달에 천만 원씩 받아서 석 달 밀린 거나 이런 걸 아닐 거잖아. 중소기업 차장급이 이 정도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아니, 얼마나 밀린 거예요?"
"하아... 모르겠어. 지금 일 년째 밀리고 있는 거고, 몇 달에 한 번씩 겨우 받고 있어. 아마 육 개월 이상 밀린 거라고 보면 되지... 나도 죽겠다. 와이프한테 할 말도 없고..."
답답한 듯 다시 담배를 다시 빨아대더군.
"거기다가..."
"거기다가요?"
"적금까지 깨서 쓰고 있어."
이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지. 목돈을 모으려고 몇 년간 넣어두고 있던 걸 중간에 취소하게 되면 원금에 손실이 날 수도 있는 계약 해지를 한다는 건 너무 심하잖아. 더 들어보니 차장급 이상은 이미 일 년 전부터 급여가 밀리고 있었던 거야. 임 팀장에게만 물어봤지만 그런 차장, 부장들이 회사 도처에 깔려있다는 말이잖아? 그 말은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회사가 비실거리고 있었단 거지. B커뮤니케이션에서 못 받은 200만 원 같은 건 애교 수준인 거지. 회사에 희생하면서 중간 관리자로 올라갔는데 이제는 회사를 위해서 월급도 희생하라는 건 무슨 심보인 건지...
임 팀장을 기준으로 C안에 있는 차장, 부장 인원들을 가지고 대충 계산해도 1억 원은 족히 될 수준이었어. 1억? 이거 너무 심각하잖아.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1억은 넘게 직원들 급여를 밀리고 있는 게 분명했어.
 
"나 두 달 이상 밀리면 그만두겠다고 얘기해 놨어."
B커뮤니케이션을 나왔던 기준을 조 과장을 비롯 우리 팀장 최 차장에게 이미 전달한 상태였어. 최 팀장은 또 급여가 많이 밀려있지 않더라. 나처럼 찾아가서 급할 때마다 독촉을 했나 봐. 계속 압력을 해대면 그 사람한테만 월급을 주는 게 말이 돼?
동갑내기 최 과장에게도 그렇게 얘기하라고 전해놨어. 최 과장도 알겠다더군. 대학 선배 구 차장에게도 얘기를 했지. 
"난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는데, 난 뭐 외부인이라 급여를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해서 큰 타격은 없었어."
말은 두 달 월급이 밀리면 나가겠다고 했지만, 막상 이때가 5월 말 경이라 취업시즌도 아니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자리가 없더군. 고민을 하고 최 과장과 옥상에 올라가 신세한탄을 하면서 일본 IT 취업을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한숨만 늘어가고 있었지. 근데 역시 대학 선후배가 좋긴 좋나 봐. 몇 주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출근해서는 내게 와 말을 꺼내더군. 당연, 구 차장에게도 나가고 싶다는 언질 줬었거든.
"장 과장, 직업학교에서 일해볼래?"
"직업학교가 뭐예요?"
"모르는구나. 아, 보통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취업을 하고 싶은데 취업이 안 되는 사람들 있잖아? 이런 친구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취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교육기관이야."
"그런 게 있었어요?"
왜, 난 몰랐지? 그걸 알았으면 나도 대학원을 가는 게 아니라 그런 직업학교에 가서 기술을 배운 뒤에 취업이나 일찍 했을 건데...
"난 부산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일 해. 거기서 디비도 가르치고 자바도 가르치고 있지. 우리 같은 프로그래밍 말고 캐드나 네트워크 같은 다른 분야도 있어. 지금 대전에 D아카데미라고 우리랑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프로그래밍 강사를 찾고 있다고 하더라구."
갑자기 대전? 너무 뜬금이 없었지. 구 차장이 얘기를 이어갔어.
"멀긴 하지? 근데 거기도 인력이 부족해서 고민하고 있고, 장 과장 너도 월급 못 받고 여기 있는 거보다 거기 가는 게 낫지 않아?"
제안이 솔깃했어. 듣자 하니 연봉도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하고, 4년 정도의 실무경력만 있으면 바로 강사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니 나쁠 건 없었지. 근데 계속 부산, 경남에서만 살던 내가 대전까지 가는 건 부담스럽지. 고향인 창원까지야 부산에서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지만 여행으로 가는 게 아닌 거기서 먹고 자고 살아야 한다는 건 꽤나 큰 결심이 필요했지.
 
주말에 창원의 부모님 집에 내려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 월급을 못 받는 것도 당연히 얘기했지. 그랬더니 아버지가 별 얘기도 없이 승용차 키를 쑥 내밀었어. 많이 무뚝뚝하시거든.
"교통수단은 해결 됐지?"
이렇게 얘길 하셨어. 완전 츤데레. 이러고 나니까 대전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더군. 
대학원 시절, 두 학기 동안 정보처리개론이라는 이름의 교양과목의 시간 강의를 한 적이 있어. 이걸 하면 월급처럼 돈이 들어오거든. 워드프로세서와 엑셀 같은 걸 가르치는 그런 강의였어. 비슷하지 않겠어? 물론 4년이나 지나서 낯설게 느껴지긴 해도 전혀 문외한은 아니니까 괜찮겠지. 구 차장을 통해 의견을 전달했고 금요일 오후에 면접 일자를 잡고 대전으로 올라갔지. 월급도 안주는 데 일이 많든 적든 월차라도 마음대로 써야지, 뭐. 
 
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됐어. 학장 면접까지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지. 왕복 6시간에 면접 1시간 반까지 걸린 대장정이었지. 합격 통지는 당연히 받았어. 7월부터 일할 수 있냐는 문의와 함께 말이지. 정말 사람이 급하긴 한가 봐. 그럼 다음 순은? C안은 탈출해야지. 도망가야지.
최 과장과 구 차장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고, 또 난리가 나면 안 되니까 팀장, 부장, 사장 순으로 퇴사 결재를 받아서 올라갔지. 희한하게 퇴사를 빨리 시켜주네? 한 달 정도 유예기간을 주는 거 아니었나. 하긴, 하루라도 줄여서 급여를 덜 주는 게 중요한 거겠지, 회사에 입장에선... 못 받은 한 달 치 월급 세금 떼고 175만 원. 여긴 연봉을 13으로 나눠서 한 달 월급을 퇴직금으로 준다고 해. 하여튼 희한한 책정 방법을 사용하고, 거기다 1년을 안 채우면 그것도 못 받아. 욕 나오는 거지. 하지만, 월급 못 받고 다니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안 준 월급은 최대한 빨리 달라고 조 사장에게 직접 요구했어.
 
별 다른 다툼 없이  C안은 도망쳐 나올 수 있었어. 대신 퇴사하는 날까지 남은 월급에서 100만 원만 주고 75만 원은 남겨 두더라. 미친 거 아냐? 그래서 이젠 조 사장에게 갈게 아니지. 배 부장에게 따져 물었어. 언제까지 줄 거냐고. 9월을 넘기지 않겠다더군. 이전 B커뮤니케이션의 200 만원 - 물론 이건 세전 금액이야. 아휴... - 보단 적은 금액이지만 겨우 200만 원가량 월급을 받는 직장인에게 70만 원이 적은 금액은 아니지.
2007년 6월 말에 퇴사를 했지만 7월 1일부터 바로 D아카데미에서 일을 할 순 없었지. 대전에 숙소도 잡아야 하고 그동안 쌓인 여러 개인적인 일도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일주일 가량의 시간은 더 필요했어. 구 차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최 과장에게 사과를 전했지. 또 계속 보자고... 그리고 미적지근하게 썸 타던 곽 대리와도 작별을 했어. 거기서 인연을 찾으면 뭐 해 돈을 못 찾을지도 모르는데... 하긴 곽 대리는 월급이 안 밀렸더라. 측근이라 이거지? 아님 공범인가? 
D아카데미로 와서 한참 정신없을 9월 초쯤 통장에 75만 원이 찍혀있고 송금처에 C안의 이름이 보였어. 밀린 월급을 다 받은 거지. 퇴사하고 두 달이 넘어서야. 아, 이제 여기와의 악연도 이제 끝났구나 싶었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