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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의 회사, 10번의 퇴사

우리는 프로잖아 - A네트 잔혹사, 하

by 유고 담요 2025. 1. 29.

 
다시 이 차장 앞에 앉은 상태로 정신은 돌아와 있었어.
 
나 혼자, 석 달짜리 블로그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를 두 달 반 동안 묵은 지 되도록 삭혀뒀다가 나에게 던지면서 이 주만에 만들어내라는 저의가 뭐냐 이거야. 마지막 발악을 했지.
"이걸 제가 왜 해야 합니까?"
나의 이 질문에 내가 2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인생 최고의 명언을 남기셨어.
"우린 프로잖아. 프로면 프로답게 마무릴 지어야지."
이 사람, 프로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건가? Professional. 전문적이라는 형용사 또는, 전문직 종사자라는 명사. 근데 그걸 여기다 갖다 쓴다고?
어느 프로가 석 달 전에 받은 프로젝트를 데이터베이스 설계 다이어그램도 그리지 않고, 화면 설계도 없이 아니 하루라도 더 많은 15일 동안 하라고 했으면 감사했을 거 같은데, 14일 만에... 뭐 프로?
'프로가 먼 뜻인지 알기나 아십니까?'
하고 올려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말끼가 통하지 않을 거란건 분명했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한번 내뱉고는 이 차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꺼냈지.
"저, 퇴사하겠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무리니까 저보다 더 프로이신 차장님이 하시면 되겠네요."
이 차장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퇴근을 했지. 퇴사는 내일 하는 거고...
 
다음 날, 7시 반에 출근했어. 당연히 사무실은 텅 비어있지. 회사에 제일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문 사장인데,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는 그다음 날 맨 먼저 출근하는 거야. 숙취를 이겨내려면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나 뭐라나? 말은 그런데 추측해 보면 누가 가장 늦게 출근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인 거 같아. 그럴 거면 새벽 3시 반까지 술을 맥이지 말라고...
 
8시가 넘고 예상대로 문 사장이 가장 먼저 출근을 하더군.
"오, 장 대리! 몇 시에 온 거야?"
자기보다 먼저 출근한 직원이 있으니 기쁘겠지. 미소를 띠고 인사를 건네고는 회사 정문 바로 옆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군. 그래도 양복 웃옷은 옷걸이에 걸어두고 준비는 해야 하니 몇 분은 기다렸지. 그리곤, 사장실로 가 문을 살짝 두드렸어.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심장이 쿵쾅대고 긴장되는 건 누구나 알겠지.
"네."
당연히 나인 건 알 거였고 짧은 답변에 문을 열고 들어갔지.
"장 대리, 무슨 일이야?"
밥 지을 것도 아니고 뜸을 들일 필요는 없었어.
"사장님, 저 A네트를 나가겠습니다."
"퇴사하겠다고?"
"네."
문 사장은 예상보다 차분했어.
"아니, 장 대리. 무슨 퇴사 얘기를 아침 댓바람부터 하나?"
"사장님께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았습니다."
"... 그래, 뭐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어제 있었던 얘기를 꺼냈지.
"이 차장님 하고 ○○○군청 블로그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를 저에게 맡기신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그게 왜?"
문 사장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다시 되물어 오더군.
"제가 그 프로젝트를 못 할 거 같습니다. 이 주만에 만들라고 하셨는데 그 안에 제 실력으로는 불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퇴사하려고 합니다."
 
문 사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
"아니, 프로젝트 하나 못한다고 회사를 그만둔다니. 못할 수도 있지. 이 친구 답답하구먼."
그래서 또 불만을 꺼냈지.
"사장님께서 입사할 때, 육 개월 뒤에 연봉협상을 다시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실망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요."
그랬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는 거야.
"내가 육 개월 뒤에 연봉협상을 다시 하자고 했다고?"

"네."
"내가 그런 약속을 했을 리가 없어."
그럼 난 뭐, 환청을 들은 건가요?
"그리고, 설사 그랬다 치더라도 내가 얘길 안 했으면 자네가 와서 먼저 얘길 했어야지!"
L○화학 같은 대기업을 다니신 분이 6개월 전에 대리 승진을 시켜주면서 연봉에 대해서 생각을 못한다고? 거긴 호봉만 올라가도 월급이 오르는데? 하!
거기에 아니라고 계속 우기지 못하고 '그랬다 치더라도, 네가 먼저 얘길 했어야 해'라는 말 자체가 대충 기억이 있다는 거 같이 들렸다. 뜨끔 했겠지.
그다음은 대충 얼버무리며 퇴사하겠다고 몇 번 더 이야기 한 다음에 사장실을 빠져나왔어.
  
이 이후부턴 진짜 난장판이었지. 박 부장이 나에게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거야.
"퇴사 이야기를 어떻게 사장님한테 바로 하는 경우가 어딨어? 회사에 대한 결재 순서도 모르는 거야?"
아, 그렇게 순서를 아시는 분이 프로젝트를 순서도 없이 주세요? 2개월 숙성이 아니라, 분석, 설계 다하고 개발자한테 주는 겁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소리를 질러.
"내가 하면 일주일이면 끝날 걸 왜 못 해!"
안 그래도 다혈질인 내 머리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를 댕기네? 나도 안 참았지.
"아, 네. 그렇게 잘하시니 부장님이 직접 하세요. 어제 이 차장님도 이 주면 다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일주일 만에 끝내신다니 시간 많이 남겠네요."
그랬더니, 얼굴이 벌게지면서 '너 인마'까지 나오게 됐어. 옆에 직원들이 와서 중재를 해서 겨우 마무리되었지.
 
인사 담당 최 이사가 나를 불러서 잔소릴 늘어놓더군.
"원래 퇴사는 최소 한 달 전에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준비를 하지."
"모르겠습니다. 전 그냥 빨리 나갈래요."
나도 막무가내였어. 그런 회사에 오래 있고 싶지도 않았거든.
결론은 2주 뒤 퇴사로 결정 났어. 사직서를 내고 나머지는 최 대리에게 인수인계하라고 했어. 한 살 많았던 최 대리에게 인수인계 할 게 딱히 없었지. 사수로 일을 나에게 알려줬는데 뭐 소스코드를 다 열어서 보여줄 것도 아니었어. 나에게 일을 알려줄 때도, '이 소스 열어서 보면 알 수 있어. 보고 공부해서 해.' 였거든.
나도 인수인계 할 때 이랬지.
"알아서 하세요. 소스코드 열어보면 주석 다 달아놨는데요, 뭐. 저한테 알려주실 때도 그렇게 주셨잖아요?"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내가 할 일이라고는 다른 회사에 이력서 넣고, 면접이 잡히면 조퇴하고 면접 보러 가는 거였지. 그리고 2주 만에 A네트를 떠나게 됐어. 회사 다니면서 가장 쉬운 일이 퇴사인 거야. 사직서 하나에 모든 게 끝나니까...
이렇게 첫 회사를 때려치우고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다음 회사인 B네트워크로 입사하게 되었어. 대기업은 공채에 뭐 일정이 무지 걸리지, 근데 중소기업 좋은 점? 바로 입사가 된다는 거.
 
A네트를 그만두고 몇 달 뒤 갑자기 ○○○군청 블로그 시스템이 생각난 거야.
'아, 이 차장도 이 주면 된댔고, 박 부장은 일주일 뚝딱 이랬으니 만들어졌을까?'
이 호기심에 ○○○군청 웹사이트로 들어가 봤어. 보통 웹사이트 대문에 들어가면 서비스하는 시스템이 메뉴로 나와 있잖아? 어디에도 블로그 메뉴는 없었어. 전부다 허언증 환자였던 거야. 
 
그리고 1년도 안되어선 다시 부산역 근처로 가게 됐어. 세 번째 회사 C안으로 이직했거든. 점심시간마다 A네트 사람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었어. 뭐 1년 가까이 지났더니 옛날의 얼굴을 붉히던 사건은 잊었는지 박 부장도 웃으며 반겨주더군. 참 사람 좋아. 그러다 운명의 점심시간이 찾아왔어. 문 사장을 점심 식사 후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된 거야. 순간 움찔하긴 했지만 내가 죄를 지은 건 아니니 그냥 인사를 했고, 문 사장도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더군. 
"장 대리, 오랜만이네! 여긴 어쩐 일이야?"
"아, 이 근처로 이직하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네?
"A네트로 다시 와야지, 어때?"
스카우트 제의인가? 뭐 회사가 좋아야지 다시 가지. 속으로는 웃음이 터졌지만, 겉으로 최대한 미소만 유지하며 대꾸했어.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다른 곳에서 더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속내는 이랬거든.
'제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A네트로는 안 돌아갑니다. 차라리 길거리에 나앉겠어요.'
다행인지 그 뒤로는 문 사장과 대면할 일이 없었어. 내가 피해 다닌 것도 한몫을 했겠지. 그 회사 사람들이 어느 식당을 주로 이용하는지 아니까 그리로 안 가면 되지 않겠어?
회사가 어떻게든 굴러가긴 했나 봐. 그러다 2012년 겨울에 폐업 신고를 했더군. 그리곤, 완전히 사라졌지.
A네트를 다니면서 배운 게 있어.
절대, 잘하는 걸 이력서에 적지 말 것. 일과 관련된 게 아니면 안 적는 게 좋아. 취미로라도 적지 마. 어학 자격증이 있으면 자격증만 있다고 해. 물론, 외국 출장을 나가거나 하는 회사라면 잘한다고 해야겠지. 그건 일이니까... 근데 관련 없는 직종이면 그렇단 거야. 컴퓨터 조립, 하... 진짜 아직도 욕이 나올려하네.
하긴 첫 회사라 많이 남네. 뒤에 몇몇 다녔던 회사는 가물가물한 기억도 있는데 말이지. 물론 좋은 의미로 기억이 남는 건 아니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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