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전인 2004년은 이상한 해였지. 부산엔 영향이 없었지만 3월에 폭설이 와서 난리가 나더니 7월부턴 장난 아니게 더운 거야. 폭설은 피해도 폭염은 못 피해 갔어. 그런 해에 첫 회사에 들어간 거야.
실력이 없으니 취업이 겁이 나 대학원으로 도망쳤고, 2년을 보냈는데 많이 들어보던 교수님의 추천 따윈 우리 전공은 없는 거야. 그러니 본인 힘으로 직장을 찾아야 했지. 열 군데 정도 서류전형에 떨어지니 자존감을 땅바닥에 붙어있었던 때에, 우연찮게 웹사이트 개발 회사가 눈에 띄었고 이력서를 넣고 처음으로 면접이 잡힌 거지. 그러니 절실하지 않겠어? 그래서 덥석 물어버린 곳이 부산역 근처에 있던 A네트였어.
첫 연봉은 부끄럽지만 1,500만 원이었어. 당시 대기업 초임 연봉이 2,600 정도였으니 꽤 많이 적은 편이지. 석사 졸업을 한 친구들이 평균 2,000 정도를 받았으니 빈약한 조건이었긴 했지. 대신, 면접 때 A네트의 문 사장이 '지금껏 석사 출신을 채용한 적이 없어 학사 졸업자 연봉을 책정하겠지만, 6개월 후 성과를 보고 다시 연봉협상을 하겠다.'라고 이야기를 먼저 꺼내 주었어. 그러니 까짓 거 취업도 힘드니 다녀보자 했지.
문 사장은 유명한 대기업 L○화학의 영업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창업을 하고자 하는 꿈을 위해 퇴사 후 A네트를 차렸어. 목요일에 회사에 입사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있던 울산까지 이동하며 치른 워크숍에서 10여 명의 직원들과 5년이 넘게 잘 운영하고 있다는 그 구전설화를 들어 알게 되었고, 그 양복을 입어야 하는 몸가짐에 대한 경영철학도 듣게 된 거야.
정말 미친 듯이 일했지. 한 번도 일정에 쫓기지 않은 적이 없었어. 짧으면 2주, 길어도 한 달? 그 안에 모든 웹사이트를 만들어 내야 했거든. 근데, 진해와 부산 사이에 있는 공공기관의 웹사이트 구축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그게 아닌 걸 알게 된 거야. 보통 프로젝트에서 낙첨을 받기 위한 '우리가 제일 잘해요, 뽑아주세요!'라고 자랑을 하기 위한 제안서 작업부터 시작해서 3, 4개월의 기간이 있어. 이런 공공기관 웹사이트 개발 예산이 5,000만 원이 넘지 않거든? 5,000만 원이면 다행이지. 그것도 안돼. 근데 거기다가 또 한 네다섯 군데의 경쟁업체가 있다면, 마음에 드는 회사에다가 살짝 귀띔을 해주지.
'저쪽 개발회사에선 4,500으로 네고를 해오던데, 그럼 A네트는 떨어지잖아요? 좀 낮추세요.'
그럼 울며 와사비먹기 식으로 우리가 책정한 프로젝트 비용을 낮춰야 해. 그럼, 전체 단가는 내려가니깐... 또 더한 건 이런 협상하는데 한 달은 또 잡아먹어. 떨어질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를 먼저 할 수 없으니 기다려야지. 그럼 프로젝트 시작은 뒤로 밀리는데, 최종 납품일자는 그대로야. 만들 웹사이트 화면에 기능 수는 똑같은데 일할 날짜만 줄어드는 거야.
이렇게 6개월을 일했어.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열정까지 담아서... 근데 연봉협상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네? 이상한 건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이 났어. 평사원에서 대리로 진급을 시킨 거야. 이유가 보통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웹사이트 개발을 하는데 개발 관계자로 공공기관 직원들과 미팅이나 전화를 할 때 평사원 직급이면 회사 체면이 서지 않는다나? 그럼, 진급을 사장 몰래 하는 게 아니잖아? 문 사장에게까지 결재서류가 올라갔겠지. 근데 왜 연봉은 협상을 하지 않고 직급만 올리는 거야. 그리고 직급이 오르면 연봉이 오르는 거 당연한 거잖아? 왜, 연봉은 안 올려줘?
그 뒤로 정말 파란난장판 일들이 내 앞에 나타났어. 들어보면 기도 안 찰걸? 과연 이런 일을 회사에서 개발자가 하는 건지 말야.
먼저 회사가 같은 건물 4층에서 6층으로 이전을 한대. 그때 뭘 했냐면 인터넷 네트워크 공사야. 처음에 이력서를 쓰면 이력서에 쓸게 없잖아? 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대학교 때 생활비나 벌어보겠다는 심산으로 컴퓨터 조립 판매, PC방이나 컴퓨터 학원에 컴퓨터 납품 및 네트워크 공사 등을 했었어. 그걸 이력서에 적었더니 나한테 그걸 시키는 거야. 사다리 타고 석면 천정 안으로 인터넷 랜선을 깔고 허브에 연결하고 이런 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을게. 하루 종일 이 일을 했는데 이거 네트워크 업체에다가 맡기면 몇 십만 원짜리 일이야.
그다음은 일본 ERP 프로젝트 제안서에서 일본어로 제안서 작성 및 인쇄 제본을 시키네. 이 것 또한 이력서에 뭐라도 한 줄 써야 하잖아. 그래서 '취미'로 일본어를 적어놨었어. 3년 정도 독학은 한 상태였거든. 심지어 회사에 여자 디자이너는 JLPT라는 일본어 자격증도 있었어. 근데 왜 나한테만? 이거 성차별이야, 아님 호구 잡는 거야?
그때부터 개발은 뒷전이로 두 달 가까이 컴퓨터에 일본어 자판 설치하고, 파워포인트에 일본어 제안서 쓰고, 점검받고, 회사 프린터는 칼라도 제대로 안되니 인쇄소에 뛰어가서 깨끗하게 인쇄해서 제본해 오고 했지. 그럼 뭐 해, 객관적인 실력이 없으니 똑! 떨어졌어.
더 가관인건 부산 남포동에서 전자레인지 돌린 시루떡 마냥 술에 찌든 문 사장이 밤까지 야근하고 있는 나를 불러 대리 운전을 시킨 거야! 양주 킵해놓은 룸살롱으로 회사에 주차해 놓은 자기 차를 몰고 와서 집으로 모셔달라는 거지. 일을 하고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도 한다는 소리가 이거야.
"일이야 내일 하면 되지." 이런, 돼지...
회사 일보다 자기 집에 가는 게 더 중요하네. 그리고 거기다 집 앞에 딱 내려다 드렸더니 한다는 소리가,
"차는 자네 집앞에 가져갔다가 내일 아침 일곱 시까지 나를 태우러 와."
출근이 여덟 시 반까지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를 가면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으니 7시 반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면 되는 걸, 사장 태우려고 6시 가까이는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잖아? 이건 지금 같으면 노동부 신고감이야. 직장인에게 가장 필요한 거 1위가 잠인데... 잠도 못 자게 하는 게 말이 돼?
그러면서 차에 내리면서 만 원짜리 두 개를 준다? 하! 진짜 대리기사네. 이럴려고 대리 직급 달아준 거지?
1년을 넘기고 연봉협상의 날이 찾아왔어. 이 꼴통 회사에 1년 반동안 있으면서 만든 웹사이트가 11개에 유지보수한 웹사이트가 6개가 넘었으니, 중간에 두석 달 동안 퇴짜 맞은 제안서 쓴다고 빠진 달을 제외하면 거의 한 달에 하나씩 웹사이트를 만들고 그 외 시간에 다른 웹사이트를 뜯고 고치고 한 거지. 꽤 많은 일을 했단 거야. 회사 직원이 20여 명이 넘었으니 막내뻘인 나는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순서가 빨리 찾아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어.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은 김 부사장 혼자.
의도하진 않았지만 평소 회식 때 완전 노총각 김 부사장과 친하게 지냈고, 따로 둘만 술을 마시며 개인 이야기도 하는 등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내가 들어가자 환하게 웃어주었어.
"장 대리."
"네, 부사장님."
"술자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지?"
"하하, 네."
잠깐동안의 침묵 후 김 부사장이 입을 열었어.
"그래, 연봉은 얼마를 받고 싶나?"
내 칼을 꺼내 들 때가 되었지.
"이천만 원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자 김 부사장의 눈매가 꿈틀거리며 표정이 굳어졌어. 예상 밖이란 거지.
"제가 일 년 동안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성심성의껏 해왔고요. 문제를 일으키거나 프로젝트를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지."
"그리고 보통 석사 학위를 받은 개발자들이 그 정도 수준을 받는 걸 알고 있는 데다..."
잠시 숨을 돌리고 큰걸 하나 던졌지.
"사장님께서 육 개월 뒤 제가 하는 걸 보고 연봉 재협상을 하겠다고 하셨는데 아무런 말씀 없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김 부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어.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하지만, 사장이 바빠서 깜빡했을 거란 얘기로 그냥 넘어갔어.
김 부사장은 짧은 침묵과 고민 후에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A4 용지를 테이블 위에 펼치며 나에게 디밀었어. 엑셀을 출력한 건데 보란거지.
"이건 우리 회사 직원 연봉 테이블인데, 원래 다른 직원들 연봉은 공개하면 안 되는 거네. 근데 장 대리가 이해를 해야 하니까 특별히 보여주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고..."
맨 위에는 경영진 이외 가장 높은 직급의 박 부장의 이름이 적혀있었어. 그리고 그 오른쪽 끝 두 셀에 이런 숫자가 적혀있었지.
'전년도 4,000만 원, 올해 4,500만 원.'
처음 드는 생각은 나쁘지 않은데? 였지만 금세 생각이 바뀌었어. A네트가 식비가 없잖아, 점심 식대. 야근을 해도 저녁 식비가 안 나오는 판국인데... 명절 선물비, 머 다 합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럼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쉬운 게 뭐냐 4,800으로 올린 뒤 12개월, 12로 나누면 400으로 딱 떨어져. 계산하기 쉽지. 그러니까 월급으로 400만 원도 못 받는다는 거야. 박 부장이 그때 15년 경력이 있다고 했거든?
15년을 일했는데 연봉이 겨우 이거라고? 나머지 사람들의 연봉도 전부 다 지나갔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내 거나 봐야지. 한 참 아래... 전년도 1,500만 원이 적혀있고 그 오른쪽에 1,700만 원이 적혀있었어. 그럼 내가 여기 회사에서 10년을 일해도 4,500만 원도 못 받는단 말이잖아?
물론, 그땐 물가 인상에 대한 개념도 거의 없을 때라 급여 인사에 대해서도 고려를 안 하긴 했지만, 다들 알잖아? 물가는 쭉쭉 잘 올라도, 내 월급은 안 오르는 거.
그랬는데 거기다 김 부사장이 아주 식초를 들이 붙네. 초를 쳐.
"우리 회사에 대학원 생에 대한 연봉 체계가 없어 그러니까, 다음번엔 고려를 해보지."
뭐여, 데자뷔여? 작년 입사 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했던 얘기를 또 하네.
이미 이때, 이런 회사 오래 못 다니겠단 마음이 굳어지고 있었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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