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반년 정도가 지나자 불편했던 목발도 필요 없이 내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 1년 뒤면 다시 발목에서 철심을 빼는 수술을 해야 하긴 하지만 다시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는 게 됐을 때쯤이었지. 별다른 큰 사건도 없는 조용한 2013년의 봄, 내 개인적으로는 큰 사건이 터진 거야. 몇 억 정도를 작은 건물 부동산에 지인과 같이 나눠서 하고 있던 투자가 큰 손해를 입게 된 거였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지인인데 돈이 부족하니 반씩 투자금을 내서 구매를 한 뒤 나오는 월세를 나눠 주겠다는 데 괜찮은 제안이잖아? 매달 150만 원 정도를 나에게 주겠다니 연 10프로의 이자율 정도 됐지. 근데 이게 다... 사기였던 거야. 하아... 친구에겐 소송을 할 수도 없는 일이야. 친구와 투자를 한 게 아니니 말야.
지금 뒤돌아 보면 별것 아닌 일이지만 겨우 1년에 4,000만 원 정도 되는 급여에서 힘들게 모아서 1년에 1,500만 원 정도를 저축하면 6년을 넘게 모아야 1억을 만드는 거야. 처음 입사를 했을 땐 이 정도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돈을 모으기 힘들었을 것이며, 이때는 한 오천만 원 만을 가지고도 투자를 할 수 있다는 걸 생각을 못해서 계속해서 모으기만 했었지. 그리고 십 년 가까이 모은 돈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솔깃한 제안에 투자를 시작했었지. 처음엔 뭐 월마다 150만 원이 잘 들어와. 그러니 괜찮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사기였다니... 이제는 아무도, 친구도 안 믿어.
마흔 살이 되려면 아직 3년은 더 있어야 할 나이었지만, 모아둔 돈을 다 날린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마흔 살이 다되어갈 나이면 십억 정도는 자산이 있을 나이잖아. 아 물론 아파트든 빚이든 다 포함해서 말이지... 나는 그때 거의 제로가 됐으니 뭐 혼이 나갈 상태였지. 그러니 슬럼프에 빠질 수밖에...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다고 일이 되겠냐 말이야. 심지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으니까 말 다했지. 술은 좀 많이 마신 거 같네. 그런 내 상태를 보더니 윤 부장이 먼저 물어와 줬고, 난 사실대로 얘길 했고, 평일 3일과 주말을 붙여서 5일간의 휴가를 회사 몰래 줄 테니 어디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해 줬어. 정말 고마웠지.
그날이 아마 수요일이었을 거야. 자가용을 몰고 그냥 부산 쪽으로 향했어. 결정한 목적지는 없었지만 동해로 가고 싶더라구. 이때 묵묵히 차를 몰다가 갑자기 생각난 사람이 있었어. 바로 수진이었지. 진짜 아무 생각이 없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거야. 그래서 곧바로 달리면서 문자를 보냈지. 아, 차를 몰면서 핸드폰으로 문자나 톡을 보내는 행위는 진짜 위험해. 함부로 하지 말 것. 나도 고속도로에서 이러다가 차선을 넘어갈 뻔했어. 오전 10시가 되기 전이니 지난번 부산 서면에 있는 학원에서 일을 한다고 했으니 일을 할 시간이라 답장이 오려면 점심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거라 생각했지. 어차피 난 계획이 없잖아? 천천히 가도 되니까 시간에 쫓길 건 없었지.
"쌤! 웬일이세요?"
어째 전화가 바로 오더라구.
"어, 수진 씨. 오랜만이죠? 근데 지금 일하는 시간 아닌가?"
"아... 오늘 쉬어요."
"그래요? 잘 됐네. 실은 지금 부산으로 넘어가고 있거든요."
"네? 지금요?"
"네. 혹시나 시간이 되면 얼굴이나 볼까 싶어서..."
"... 아, 네. 그럼 언제쯤 도착하실까요?"
수진은 생각 외로 순순히 만나자고 하더군. 잘 됐다는 건 내가 바로 기다리지 않고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어. 분명 엄청 우울해져 있던 기분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수진의 얼굴을 보자 조금 밝아졌어. 잠시 돈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
"오랜만이에요, 쌤!"
"얼굴 보는 건 5년 만이네? 잘 지냈죠?"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슬랜더 몸매에 긴 생머리는 그대로에, 약간 끝이 처진 눈매로 웃으며 반겨주었어. 집 앞에 나오는데 정말 단출한 집에서 입는 트레이닝복 스타일로 나오더군. 화장도 거의 안 한 얼굴이었지. 나를 남자로는 보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어. 뭐, 그래도 상관은 없었지. 그냥 얼굴을 보면서 기분전환, 이성을 만나는 걸로 마음의 위로라도 얻을 수 있으니깐 말야. 그녀의 집 근처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 미리 준비하고 들고 있던 캔 커피를 건네주고 비어있는 벤치에 앉았어. 가볍게 한 모금 커피를 마시고는 얼굴을 보며 웃었지.
"오늘만 쉬어요?"
"아... 지금 다른 강사님 강의기간이라 일주일 정도 안 나가요."
"좋네... 수업 없다고 쉰다니... 난 수업 없어도 매일 나갔는데."
"저두 수업 비어도 나가긴 해야 해요. 사실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에 간다고 다른 강사님께 일주일만 부탁을 드렸어요."
"어디 아파요?"
글쎄 그렇게 아파 보이진 않았는데 병원을 간다니 궁금해지더군.
"네... 조금..."
말을 흐리는 걸 보니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더 물어보지 않았어. 그래서 잠시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까 수진이 물어오더군.
"쌤은 평일날 어떻게 오셨어요?"
"아... 내가 개인적으로 안 좋을 일로 헤매고 있으니까 우리 부장님이 휴가를 며칠 주셨어요."
"무슨 안 좋은 일이시길래요?"
조금 머뭇거렸지만 사실대로 말했어. 돈을 다 날린 얘기. 그랬더니 같이 안타까워했어.
"어쩌다가... 조심하시지... 어떡해요, 그 큰돈을 날려서?"
"뭐... 다시 벌어야죠."
"근데, 저랑 연락이 안 되면 어쩌시려고 하셨어요?"
음... 그렇게 물어보며 나를 옆으로 바라보는 수진의 눈빛에서 그냥 보통의 강사와 학생 간의 눈빛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면 이상한 걸까? 실은 D아카데미에 있으면서 취업 지원을 할 당시에 따로 수진을 불러서 저녁을 먹고 술을 한 잔 하면서 취업을 하도록 북돋은 적도 있긴 했어. 뭐 미성년자 고등학생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면 상관없지. 6개월 훈련 도중 두 달에 한 번씩은 회식도 하는데 말야. 둘이서 본 건... 음... 인정하지. 남녀 사이로도 관심은 있었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여러 상황으로 별 결론 없이 끝났던 관계였는데 입원 동안 연락이 오고 또, 내 사정으로 이렇게 연락을 해서 다시 얼굴을 보고 하는 게 그냥 인연은 아닌 거 같더라.
"그냥 바로 동해로 갔겠죠."
"그러면, 제가 이번 주 쉬길 잘한 거네요?"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은 뒤 캔 커피를 홀짝이는 수진의 얼굴을 보니, 다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어. 그렇게 수진을 들여보내고 난 해운대를 지나며 해안도로 국도를 타고 천천히 동해로 올라갔어. 속초까지 올라가며 중간에 하루를 더 쉬었고, 속초에 대포항과 근처 해수욕장에서 몇 시간을 멍하니 바라만 바라보며 앉아있다 더 이상 흔들리지 말자는 다짐이 서더군. 돈 그까짓 거 다시 벌면 되지, 안 그래? 그렇다고 집안이 어려워 내가 생활비를 계속 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하니까 말이야. 털고 일어나서 왔던 대로 다시 차를 돌렸어. 내비게이션이 보급이 안되었던 때라 서울에 있는 친한 대학 친구, 선후배들을 보고 싶어도 무서워서 못 가겠더라고.
다시 내려와 일에 매진했어. 휴가를 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일이 잘 되더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수진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어. 처음엔 조금 서먹해하더니 두세 번 지나니까 편하게 전화를 받아주더군. 남친이 없는 것도 알았으니 친하게 지내는 건 문제없잖아. 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엔진 특수기계 품질관리 시스템 개발은 모두 마무리되었어. 그 뒤 다시 사무실로 복귀한 뒤 다시 일 없이 손만 빨고 있는 시간이 계속되었어. 그동안 E에스아이 박 사장이 비어있던 건물 공간에 트랙터 엔진을 가져와 100퍼센트 연료효율을 가지는 자동차 엔진을 발명하겠다는 이상한 사람을 데려와 투자를 하는 사기 같은 일도 당하고 있었어.
2013년 8월, 드디어 나의 퇴사 조건이 만족되는 일이 벌어졌어. 월급이 두 달 밀린 거야! 바로 윤 부장에게 달려갔어.
"부장님!"
"어, 장 차장. 왜?"
"저 퇴사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그런 얘기를 점심 먹기 전에 해?"
"사무실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윤 부장은 인상을 쓰며 나를 올려다봤지만 그렇게 화가 난 얼굴은 아녔어.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미팅으로 자리에 없었거든. 윤 부장은 나를 따로 회의실로 데려갔어.
"월급 때문이지?"
"네, 아시잖아요. 예전 회사에서도 월급 안 나와서 나왔는데. 여기서도 이럴 줄 몰랐네요."
"... 미안하다."
"부장님이 왜 미안해하세요."
월급이 밀리는 회사를 몇 번 겪었던 나는 월급이 밀리는 회사 대표들의 행태를 알고 있던 터라, E에스아이가 월급이 밀려가는 몇 개월 동안 나의 과거 얘길 윤 부장에게 알려주었지만 이 회사가 처음이며 15년을 다녔던 윤 부장은 박 사장이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내 얘기처럼 회사가 될 거라는 걸 믿지 않더라구. 하지만, 내 예언(!)대로 되니까 윤 부장도 한숨만 나오는 가봐.
"어디 다음 갈 곳은 있어?"
"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엔진 특수기계 시스템들 먼저 개발했던 F플러스 선배님께 얘길 했더니 퇴사하면 연락하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 우리도 얼마나 견딜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께 보고할게. 사직서 작성해서 결재 올려라."
이렇게 아름답고 깔끔하게 마무리가 됐으면 좋았겠지만, 4년 7개월의 E에스아이 퇴사 이후엔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윤 부장, 제 차장, 임 과장 등이 모두 퇴사를 했고 난 받지 못한 월급 500만 원에 대해 노동부에 고소를 했어. 그때 들었던 다른 직원의 미지급 급여는 끔찍했어. 거의 쓰레기 좋소였던 C안에서 있었던 거랑 똑같이 윤 부장은 5,000만 원, 제 차장이 3,000만 원, 심지어 임 과장까지 1,000만 원의 월급이 밀려온 거였어. 윤 부장을 통해 전해 들은 E에스아이 경영진의 상황은 C안보다 더 심각했어. 김 이사나 다른 이사들도 1억이 넘는 급여가 밀려있어! 경영진은 더 오랫동안 받질 못했고 회사에 투자를 하는 직위라는 명목이라 노동부에 신고도 못했다네?
곧, 창원 노동지청에서 한 차례 3자 대면을 가진 뒤 세 사람과 나까지 E에스아이로 호출을 해, 박 사장이... 그래서? 갔지. 나는 F플러스에 일하고 있을 때라 잠시 외출을 해서 공장 건물로 올라갔어. 두 회사가 무지 가까웠거든. 나를 포함 노동부에 고소한 네 명이 모두 사장실에 같이 들어가 앉았어. 박 사장은 그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더군.
"윤 부장, 많이 힘들었나 보네.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윤 부장은 신입으로 E에스아이에 들어와서 박 사장과의 친분이 남다르니 그 상황이 많이 껄끄럽고 불편해 박 사장과 눈도 못 맞추는 거야. 제 차장도 오래 다녔지. 그럼 어쩌겠어? 내가 나서야지.
"아, 사장님. 우선 노동부 신고는 제가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께 얘기를 해 고소가 진행된 거라 거랑 얘기하는 게 빠르실 겁니다."
그러자, 박 사장 얼굴의 웃음기가 사라져 가. 그리고는 잠시 침묵 후 본론으로 들어가더군. 고소를 취하해 달래. 고소가 진행 중이면 사업진행에 문제가 생긴대. 아마 대출이 안될 거야. 신용 제재가 들어가니깐. 하지만 노동지청에서 우리에게 얘길 해준 게 있어. 고소를 취하하면 임금을 여전히 못 받아도 다시 고소를 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싫다고 했지.
"각서를 쓰지. 3개월 안에 체불 임금을 지급한다고 말이야."
박 사장은 각서를 쓴대. 장난하나. 각서가 무슨 법적인 효력이 있다고. 그래서 난 이미 인터넷에 찾아본 정보로 강수를 던졌어.
"공증 서주십시오. 법무사무소나 변호사무실에서 공증을 서주세요."
그러자 박 사장은 더 이상 사람 좋은 아저씨 얼굴이 아니었어. 시뻘게진 헬보이가 됐어.
일주일이 되기 전, 노동지청 근처 법무사무소에서 E에스아이에서 작성한 각서 네 장을 공증받았어. 총 100만 원. 하하! 나는 각서에 쓰여있던 것과 같이 3개월 안에 500만 원을 다 정산받았어. 임 과장은 4개월, 윤 부장과 제 차장은 반년이 걸리더군.
몇 달이 지나고 체불 임금 정산 멤버 네 명이 한 자리에 모여 회식자리를 가졌어. 아직 나도 전부 돌려받기 전이었지. 윤 부장과 다른 사람들의 신상이 궁금하더라고. 나는 F플러스 다니고 있으니까...
"부장님은 어쩌고 계세요?"
"나, 회사 차렸다."
"네? 정말요?"
"◇◇엔진에서 다음 일을 할 회사가 필요한데, 우리 멤버가 다 빠져버려서 일 주기가 힘들다는 거야. 그러다가 ◇◇엔진, 송 과장이 윤 부장에게 회사를 창업하면 바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더군. 그래서 회사를 만들었지. G이앤아이, 우리 회사 이름."
"와! 이제 윤 사장님이네요."
건배를 했지. 윤 부장은 사장이라는 호칭은 안 쓸 거래. 사장이라는 직급으로 개발을 하는 게 별로 좋게 안 보인다나. 그럴 수도 있겠지. 술잔이 한참 더 기울어지고 있던 때 윤 부장이 한 가지 얘길 해줬어.
"박 사장 말야."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이마를 찡그리며 얘기를 이어가.
"나중에 들었는데, 우리 월급이 밀리고 있는 상황인데 박 사장은 미국에 유학 중인 자기 딸한테 일 년에 몇 억씩 돈을 보내고 있었다네."
그 말을 듣자 쌍욕이 나오려 하다가 그걸 참고 잔에 담긴 맥주를 다 들이켜버렸지.
"그게 사실이면 정말 쓰레기네요. 회사 직원 월급은 안 주고 집에는 돈을 펑펑 썼다고요. 하... E에스아이는 이제 입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껏 다닌 회사 중 가장 큰 규모였던 E에스아이는 이후 꽤 크건 공장 건물을 처분하고 1년 뒤 가을, 폐업을 했어. 희한한 건 내가 다녔던 F플러스 근처 오피스텔 건물 4층에 설계팀 부장이 같은 이름으로 좀 작은 규모로 회사 명맥을 이어가더군. 그럼 뭐 해. 여기도 몇 년을 못 넘기고 문들 닫았어.
E에스아이에선 좋은 걸 배웠지. 임금체불 시엔 곧바로 노동부에 신고하라. 고소야. 이거 걸면 얄짤없이 갚아야 돼. 단, 고소를 취하해 달라는 말에 그냥 취하해 주면 절대 안 돼. 무조건 공증을 받고 취하해 줘야지. 그런데도 E에스아이처럼 돈을 안 주는 더 쓰레기 대표도 있대. 그럼 민사소송까지 가야 돼. 하긴, 대표가 미쳤으면 방법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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