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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의 회사, 10번의 퇴사

갑을병... 신에겐 - B커뮤니케이션 수난기, 상

by 유고 담요 2025. 2. 1.

A네트에 퇴사 통보를 한 뒤, 새로운 일자리를 바로 찾기 시작했어. 외국 IT 개발자처럼 회사 퇴사하고는 반년 정도 쉬면서 해외여행도 가고, 여유를 즐기다 '이제 다시 일을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면 일을 다시 하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2년도 안 되는 어중간한 경력에 부모님 의료보험도 책임져야 하는 장남이거든... 아, 슬프네
대신 A네트에서 개고생을 시켜준 뒤 고마운 건 하나 있었어. A네트 들어갈 땐 이력서에 기재할 내용이 없어서 특기는 컴퓨터 조립, 취미는 일본어라는 그 내용 때문에 회사 이전할 때 네트워크 공사며, 일본어 제안서 덤터기를 쓰곤 했었잖아. 근데 1년 반 동안 웹사이트 개발 11개, 웹사이트 유지보수 6~7개를 하고 나니까 경력사항에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거야! 뭐, 그것 때문에 B커뮤니케이션에 단번에 붙은 건지도 몰라. 특기와 취미는 과감히 지워버렸어. 하하하!
이전엔 지하철을 타고, 걸어서 30분 조금 넘게 출근시간이 걸렸다면, 여기는 20분도 안 걸렸어. 왜냐, 내가 살던 원룸에서 4키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광역시 재단 기업지원 센터였거든. 가까우니 정말 좋아야 하지만 단점은 버스를 잘못 타면 가파른 언덕을 10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는 거였어. 건강엔 최고지!
 
B커뮤니케이션은 직원 수가 다섯 명밖에 안되는 작은 회사야. 그렇지만 짧은 이직 시간에 가려고 결정한 데는 연봉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지. 2,400을 주겠다잖아! 일 년이 조금 지나고 나서도 A네트에서는 1,700만 원밖에 못 주겠다는데, 파격적인 조건이지 않아? 그러니 골머리 앓으며 다른 곳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리고, 기도 작고 덩치도 작은 편인 연 사장은 나보다 두 살 밖에 많지 않은 대학 선배였어. 뭐, 과는 화학공학과라든가, 다른 과였지만 말야. '어떻게 이런 어린 나이에 회사를 차릴 생각을 했지?' 싶었고 정말 대단하고 생각했어. 큰돈을 벌기 위해서? IT 개발 시장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모르겠어. 물어보질 않았으니...  그래도 꽤 많은 웹사이트들을 관리하고 있었으니 회사가 잘 굴러가겠거니 싶었지. 나야 뭐 월급만 많이 받으면 되는 거야.
작은 개발회사라 적응할 여유도 없이 바로 일을 시작해야 했어. 이 건물의 주인인 광역시 재단의 홈페이지를 시작해서 공공기관 웹사이트, 일반 기업 웹사이트도 손보고 개발을 하곤 했는데 일하는 게 A네트에서 하던 것과 차이가 없었어. 그러니 그냥 웹사이트 특징만 잘 파악하곤 곧바로 시작하면 되는 정도였지.
 
A네트에서도 출장이 있긴 했지만 B커뮤니케이션은 좀 더 많은 편이었어. 한때 급회전을 했다간 차가 쓰러져 버리는 한때 유명했던 소형 경상용차를 회사 업무 차량으로 썼는데, 한 번은 공업단지로 나를 태우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출발하더군. 조금 달리다가 얘기를 시작해.
"장 대리, 우리 삼○전기로 가는데요."
연 사장은 회사 직원들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네, 삼○전기. 알고 있습니다."
"근데, 장 대리. 밀링 머신이라고 압니까?"
물론 알지. 쇠를 깍아 필요한 물품의 틀이나 부품을 만들어내는 기계라는 건 알고 있지.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대로 얘기해야겠지?
"네, 압니다. 쇠 깎는 기계라는 것만 압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핸들을 돌려 부드럽게 우회전을 하며 연 사장이 이야기를 해갔어.
"그죠.  삼○전기에서 좀 오래된 밀링머신이 있는데 제어 프로그램을 손봐서 제대로 동작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엔지니어링에 그걸 손 볼 인력이 없대요. 그래서 우리가 맡아서 해야 할 거 같은데..."
하며, 말을 흐리더군. ○엔지니어링? 우리 사무실이 있는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규모가 좀 있는 개발회사야. 뭐, 이름이야 왔다 갔다 하면서 엘리베이터 앞에 적혀있는 이름이야 몇 번 봐서 알지. 이때부터 이 ○엔지니어링과의 악연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어. 연 사장도 내용은 전혀 모르니 나를 데리고 직접 삼○전기 공장으로 가는 거였지.
진짜 구닥다리 기계더군. 옆에 다른 기계들은 최신식인게 눈에 보일 정도라면, 눈앞의 밀링머신은 고물사에 갖다 주기 거의 직전처럼 보였어. 한 마디로 밀링머신을 만든 회사에서 손봐주지도 못할 정도라는 거야.
삼○전기의 담당자가 와서 연 사장이 얘기한것 처럼 '제대로 동작하도록' 만들어달라며 CD 한 장을 건네주네. 그래서 물어봤지.
"이 머신 언어는 뭔가요?"
"아마 씨일걸요?"
C! 이런 씨... 내가 제일 못하는 프로그램 언어인데... 심지어 학교에서 배울 때도 '응, 그래 씨언어는 다음 생에...'라고 하고는 공부를 안 했던 거였어. 
역시 안되는 거였어. 이틀 동안 CD 안에 있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돌려보고, 분석해보고 해도 눈으로 직접 기계가 동작하는 걸 보는 게 아니니 어떻게 할지 감도 안 잡히더군. 그래서 과감히 이건 포기하자, 마음먹고 연 사장에게 갔지. 그리곤 다소곳이, '못하겠어요'라고 말을 하자 의외의 반응이 왔어.
"그래요? 음... 그럼 하지 맙시다. 어차피 돈도 안 되는 데 하다가 못 끝내는 것보다 낫죠.  ○엔지니어링 사장님에게 얘기하고 못하겠다고 할게요."
이게 통한다고? 이걸 받아들이네. 뭔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란 게 A네트에서 받았던 배신감과는 정반대의 신뢰감이 느껴졌어. 사람이 이렇게 논리적이구나. 안 되는 건 붙들지 않고 다음을 위해서 포기할 줄 아는 회사의 대표. 나이도 어리지만 이렇게 통찰력이 있어. 아주 믿음이 갔지. 이렇게 일하나면 두려울 게 없을 거 같았어.
 
"○○공원 아시죠? 장례식장인데 여기에 이번에 새로운 조문 시스템을 개발한답니다."
회의실에 모여 앉아 연 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어. 다섯 명 회사에 연 사장, 이 부장, 디자이너 최 사원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이 앉아있었지. 영업 담당인 박 부장은 영업 중이었구.
"조문 시스템이 뭐냐면 장례식장 웹사이트를 새로 만들면서 온라인으로 조문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같이 만들자는 거예요. 사정이 생기거나 해외에 있어서 조문을 오기 힘든 사람들이 웹사이트에 조의금을 결제하고 조문메시지를 적으면 그 내용이 장례식장안에 있는 티브이에 나오는 거죠."
○공원은 대학생 시절 친한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 번 가봤던 부산 외곽쯤에 있는 아주 큰 장례식장이야. 여기 일을 따내다니 역시 연 사장! 대단하다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이 부장이 연 사장에게 넌지시 묻더군.
"사장님, 그럼 ○텍에는 언제쯤 가서 미팅을 하죠?"
○텍? 여긴 또 어디야?? 싶을 때 연 사장이 답을 하더군.
"네, 곧 일정을 잡죠. 원래 ○텍에서 수주한 프로젝트인데 개발 인력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온 겁니다."
하며, 나머지 직원들에게 부가설명을 하더군. 얼마 전에도 삼○전기와 ○엔지니어링에서 들었던 거 같은 데... 또 데자뷔인가? ○공원과 ○텍이라 이거지.
미팅이 끝나자 이 부장에게 살며시 물어봤어. 그랬더니,
"그렇죠? ○텍 일을 하청 받은 거예요."
하청? 그때까지 잘 모르던 세상을 알게 되었어. 하도급, 하청. A네트에서는 그래도 직접 제안서를 써서 발표하고 여기서 선정돼 일을 했으니 이건 몰랐지. 아 물론 A네트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난 맨 꼬랑지에서 개발만 하다 보니 알지 못했는데, 더 조그만 회사에 오다 보니 뉴스에 건설업체들의 소식에나 나오던, IT업계에도 만행하는 지저분한 밑바닥을 접하게 된 거야. 
공원을 '갑'이라 하고 ○텍을 '을' 그리고, 우리 B커뮤니케이션을 '병'이라고 부르는 하도급 구조이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천간을 하도급 구조에 누가 먼저 썼는지는 모르지만 10개의 순서가 쓰기 좋았나 보지? 거기에 B커뮤니케이션은 병의 위치에 있는 거야. 이거 문제가 갑이 의뢰를 한 을이 일을 처리 못해서 다른 업체에 하청을 주면서 자기들도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프로젝트 비용을 줄여서 의뢰한다는 거야. 이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잖아? 이때까진 얼마나 남겨먹고 우리에게 줬는지는 나는 모른다는 거지만, 나야 일만 해서 제때 납기만 맞추면 되는 거지.
나중엔 이 갑을병의 하도급 구조가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되지.
○텍에 가서 미팅을 하며 개발 전체 구조는 이랬어. 각 장례식장 빈소를 찍고 있는 CCTV의 화면과 조문 내용, 그 외 기본적인 조문에 관련된 그래픽 화면을 20초 정도마다 영상을 전환해서 24시간 TV에서 끊이지 않는 방송 시스템을 만들라는 거야. 그러면서 우리에게 CCTV 샘플을 전해줬어.
오래된 일이라 완벽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래도 많이 잊히지 않는 건 전혀 해본 적도 없는 CCTV 카메라 영상 처리와 그 외 화면 디스플레이 전환 작업 등을 처리하기 위해서 밤늦게까지 분석하고 소스를 코딩하고 해 갔다는 거야.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아무런 문제 없이 ○텍에 납기 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대로 공원에 CCTV를 설치하고 각 빈소의 TV마다 내가 만든 화면이 나오고 동작하는 걸 보면서 꽤나 뿌듯했던 기억이 나.
 
얼마 지나고 ○텍에서 전화가 왔어. ○○공원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가서 확인하라고 말야. 하필 그날따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어. 연 사장이 바로 출발하라더군. 그래서 지하 주차장을 가서 업무차량에 올라탔지. 그리곤 시동을 걸었는데 와이퍼가 안 움직이네, 운전석의 와이퍼만?
하하하, 거의 목숨을 걸고 운전한 거야. 빠른 길이라고 시내 고속도로를 조수석 와이퍼 사이로 앞을 보면서 장례식장에 도착해 일을 봤어. 다행히 돌아올 땐 비가 그쳤지. 회사에 돌아와서 연 사장에게 물었지.
"사장님, 운전석 와이퍼가 안 움직이던데요?"
그러자 연 사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보며 말하더군.
"아, 그렇죠? 고친다는 걸 깜빡했네?"
알고 있었는데,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 데 가라고 했다고? 그러자 등 뒤로 소름이 끼치더라고. 
 

계속...